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이 자리에 참석하신 내외 귀빈 여러분.

오늘 우리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이 땅의 국권을 되찾은 그날의 감격을 다시금 기리기 위해 독립기념관에 모였습니다. 우리 독립기념관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1941년 중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미우사 신부에게 준 태극기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내용을 현대어로 의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미우사 신부님에게 부탁합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려고 성심껏 도와주고 있으니, 이번에 여행하는 어느 곳에서나 우리 한인을 만나는 대로 이 말을 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망국의 설움을 면하려거든,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거든, 정력·인력·물력을 모두 광복군에 바쳐 힘을 가진 세상의 나쁜 무리인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완성하자."

— 1941년 3월 16일, 충칭에서 김구 드림

여기서 우리는 광복절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 배후에는 광복군 활동을 지원한 이름 모를 국내외 후원자들과 벨기에 출신의 미우사 신부와 같은 세계인이 자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대한민국의 광복은 세계사적인 사건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우리 조상들은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36년의 일제 식민지 통치 아래 갖은 핍박과 고통을 이겨내고 불굴의 투쟁정신으로 독립을 쟁취한 날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던 민족주의 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위당 정인보 선생은 광복의 기쁨을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정인보가 “길이길이 지키자”고 부르짖었던 대한민국은 지금 ‘한강의 기적’과 민주화를 통해 세계가 주목하는 ‘경제 대국’, ‘문화 강국’을 건설했지만, 자랑스러운 역사의 이면에는 ‘갈등 공화국’이라는 심각한 사회문제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에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국민 통합’을 강조하면서 “국민 통합은 대통령 책임”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렇게 광복 80주년을 맞이한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최우선 과제가 **‘국민 통합’**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갈등에는 역사 문제가 한몫을 차지하고, ‘광복’에 관한 역사인식의 다름이 자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의 ‘광복’을 세계사적 관점에서 보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로 얻은 선물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해방 이후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들의 필독서이던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는 “해방은 하늘이 준 떡”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해석은 “항일 독립전쟁 승리로 광복을 쟁취했다”는 민족사적 시각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세계가 주목하는 3·1운동으로 ‘자주 독립국’임을 선언하고, 이를 계기로 우리의 독립운동은 국내외에서 다양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임시정부는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과 일제에 맞선 무장 항쟁을 병행하여 국제적인 여론을 환기시켰습니다.

1932년 4월 29일, 24살의 청년 윤봉길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장절 및 전승 기념식장에 폭탄을 투척하여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가 의거 직전에 <두 아들에게 남긴 유서>에는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여 에디슨 같은 발명가가 되거라”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윤봉길이 조국 독립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희생하면서도 두 아들은 과학자가 되기를 소망하였던 것처럼, 역사의 이면에는 다양성이 존재합니다.

광복은 ‘과거의 종결’이 아니라 ‘미래를 여는 책임’입니다. 우리는 오천년의 역사를 공유한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역사를 이해하는 데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이 다름이 국민을 분열시키는 정쟁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역사 전쟁을 끝내야 합니다. 이 바탕 위에서 국민 통합을 이루고, 진정한 광복의 완성인 통일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광복 80년을 맞이한 우리가 다져야 할 사명입니다.

2025년 8월 15일

독립기념관장 김형석